[메이데이에 관하여] 갑자기…정말 뜬금없이, ‘메이데이(May Day)’에 대해 쓰고 싶어집니다. 메이데이는 우리나라 말로 ‘근로자의 날’입니다. 매년 5월 1일이 그날이죠.
사람은 누구나 일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하니 이 날은 성(聖)스런 날입니다. 노동단체들은 ‘노동절’로 부르기도 하지만 정부 공식명칭은 ‘근로자의 날’입니다.
‘메이데이’의 유래를 아세요? 일반적으로 알려진 유래는 이렇지요.
<…1886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에서 하루 16시간 일하던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을 주장하며 파업을 일으키자 경찰이 발포해 소녀 1명을 포함한 노동자 6명이 사망했다. 다음날 이에 항의하기 위해 노동자 30만 명이 시카고 시내의 헤이마켓 광장에서 집회를 가졌는데, 누군가 폭탄을 투척해 아수라장이 됐다. 법원은 그 책임을 물어 파업 지도자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나중에는 이 사건의 기획자가 자본가이었음이 드러났다.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5월 1일을 메이데이로 정했다.…>
그러나 이 일화는 거짓임이 판명 났어요. 특히 폭탄 투척의 실체가 자본가라는 사실은 전혀 진실과 다릅니다.
사건이 일어난 1880년대 시카고는, 동부는 물론이고 유럽에서 건너온 노동자들로 북적대는 신생 공업도시였지요. 여기다 철도교통의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물동량(物動量)이 급증, 시카고의 기업가들은 큰 부(富)를 축적했지요.
그러나 노동자들은 저(低)임금과 긴 노동시간에 시달렸어요. 독일과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 온 노동자들은 시카고 북쪽에 집단적으로 거주했는데 생활여건이 매우 열악했었다고 해요. 당시 유럽에선 마르크스가 이끄는 공산주의 운동과 바쿠닌이 이끄는 아나키즘 운동이 융성하던 시기로, 이들 유럽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그런 사상까지 흡수됐어요. 시카고는 산업화로 인한 계층 간 사회갈등이 폭발하기 직전이었지요.
앞서 1867년 일리노이주는 미국 최초로 노동시간을 8시간으로 제한하는 주법(州法)을 제정했었지요. 참다못한 시카고 노동자들은 1885년 5월 1일을 기해 8시간 노동을 내걸고 시 전역에서 파업을 벌이기 시작했지요.
5월 4일 오후 7시 30분쯤, 약 1500명의 군중이 시카고 다운타운의 ‘헤이마켓’이라고 부르는 농산물 장터에 모였습니다. 이날 집회는 전날 있었던 발포 사건(5월3일 시카고 ‘매코믹 농기구 제작소’ 파업을 진압하던 경찰의 발포로 노동자 4명이 사망)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집회를 주도한 독일 태생의 사회주의자 오거스트 스파이스는 대중연설가로 잘 알려진 앨버트 파슨스를 소개했고, 파슨스는 한 시간 정도 연설을 했지요. 마지막으로 사무엘 필덴이 연단에 올라왔을 때에는 주변이 어둑어둑해졌을 무렵이었습니다. 당시 파슨스는 신문 인쇄기술자였고, 스파이스는 독일 출신 노동자를 위해 독일어로 발행하는 《아르바이터 차이퉁》(노동자 신문)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 사회주의 혁명을 선전하는데 앞장서고 있었습니다.
필덴의 연설이 끝난 시각은 밤 10시 20분. 청중은 500명 정도에 불과했어요. 이때 176명으로 구성된 시카고 경찰 지대(支隊)가 헤이마켓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경찰 책임자는 해산을 명령했고 그 순간, 폭탄이 날아왔습니다. 놀란 경찰관들은 어둠 속에서 총을 발사했지요.
당시 《시카고 트리뷴》은 ‘폭탄이 터지자 아나키스트들이 경찰을 향해 총을 발사했고 경찰이 응사했다’고 보도했지만, 사실은 경찰이 쏜 총탄에 경찰관과 민간인이 맞았던 것이었어요. 총알과 탄피를 분석하면 누가 몇 발을 쏘았는지 알 수 있지요. 이 사건으로 경찰관 7명과 민간인 다수가 사망했습니다.
5월 5일자 《시카고 트리뷴》 보도 이후 여론은 들끓었습니다. 미국 전역의 신문이 “가해자들을 처형하라”는 사설을 연일 실었으니까요.
11월 11일 시카고 교도소에서 스파이스와 파슨스 등의 교수형이 공개적으로 집행됐습니다. 이에 앞서 독일의 사회당 당수이자, 칼 마르크스의 딸인 엘리노어를 비롯해 유럽의 사회주의 인사들이 앞 다퉈 교도소를 찾아왔지요. 시카고의 노동자단체들은 무죄를 주장하며 십시일반 돈을 모아 변호사를 선임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스파이스는 “우리의 침묵이 우리를 교살(絞殺)하는 당신들의 목소리보다 강력해질 때가 올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스파이스, 파슨스는 처형됐고, 필덴은 종신형으로 감형된 뒤 나중 특별사면 됐지요.
유럽의 공산주의자들은 파슨스 등을 순교자로 추모했고, 1890년부터는 5월 1일을 ‘노동절’로 정했습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뒤 그 사건으로 구속 또는 사형된 이들 모두가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폭탄을 투척했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폭탄을 투척한 범인이 사건 발생 후 사라져 버린 ‘슈나우벨트’나 자살한 ‘다이어 럼’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슈나우벨트는 사건이 일어난 그해 5월 7일 체포됐다가 경찰이 실수로 풀어준 뒤 곧바로 도주, 캐나다와 영국을 거쳐 아르헨티나에 정착해 살았다고 합니다.
아나키스트였던 럼은 파슨스를 자주 면회했는데 1893년 갑자기 자살해 많은 의혹을 남겼습니다. 그는 아무런 유서를 남기지 않았지요. 세월이 흐른 뒤 한 학자가 이 사건을 추적한 뒤 폭탄 투척범이 럼이라고 단정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일제 식민지로 있던 1922년 5월 1일 조선노동총연맹 주도로 첫 노동절 행사가 열렸습니다. 해방이 된 뒤에는 대한노총(1946년 창립),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 등 좌우익 노동자단체가 발족돼 각각 따로 노동절 행사를 가졌지요. 1946년 5월 1일 노동절 행사는 대한노총 등 우익이 동대문운동장(당시 명칭은 서울운동장) 축구장에서, 전평 등 좌익은 야구장에서 기념식을 열었답니다.
정부 수립 후에도 ‘메이데이’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됩니다. 이승만 정권시절인 1957년에 대한노총 창립일인 3월 10일로 ‘노동절’을 바뀌었고,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1963년 무렵에는 명칭마저 ‘근로자의 날’로 고쳤지요.
그러다 문민정부 시절인 1994년에 ‘근로자의 날’을 메이데이와 일치하는 5월 1일로 변경했습니다.
기념일이 5월1일→3월10일→5월1일로, 명칭은 노동절→근로자의 날로 바뀐 셈이지요.
메이데이 명칭을 ‘노동절’로 부를 것이냐, ‘근로자의 날로’로 부를 것이냐는 여전히 민감한 현안입니다. 노동, 노동자라고 부르는 개념 속에는 자본가와 투쟁하는 일종의 계급의식이 내포돼 있다는 시각이 적지 않지요. 그래서 박정희 정권 시절, ‘근로자’라는 말로 바꾸었지요.
물론, 노동운동계는 ‘노동절’ 이름을 돌라달라는 요청을 진작부터 하고 있습니다. 노동절이란 명칭을 회복시키자는 주장에는 개발독재와 노동운동 탄압의 산물을 청산하자는 속내를 깔고 있어요. 몇 해 전 한국노총은 국회에 ‘근로자의 날’을 ‘세계 노동절 기념일’로 명칭을 변경해 달라며 법 제정 청원을 냈지만, 정부는 조심스런 반응이었습니다.
고용노동부는 “현행 ‘국경일에 관한 법’에는 국민적으로 경사스러운 날을 축하할 때 절을 쓰도록 돼 있어 3.1절, 광복절, 개천절, 제헌절 등 4개 기념일만 절을 붙일 수 있다. 노동절 명칭 변경은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자 정치권에서는 ‘근로자의 날’과 ‘노동절’을 절충한 ‘노동자의 날’로 쓰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어요.
어쩌면 명칭을 둘러싼 논란은 우리 사회가 아직 성숙되지 못했다는 방증이 아닐까요? 노동절이 계급의식을 연상시킨다는 주장은 시대가 바뀌면서 설득력이 줄어들고 있지요. 마찬가지로 근로자의 날이라고 부른다고 노동자의 권리가 침해받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명칭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가 반영되었느냐 여부입니다.
>>생각하기
1970~80년대 우리나라 노동의 현실을 나타내는 세 편의 글을 읽어 보세요.
㉮ 왜 밑바닥인생들은 항상 밑바닥 생활을 하게 되는가? 왜 고통받는 사람들은 항상 고통만 받고 있는가?
우리는 흔히 수없이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한줌도 못되는 ‘소수’의 억압자들에 의해 짓밟히고 수많은 노예들이 채찍에 시달리며 묵묵히 중노동을 하는 장면을 볼 때, 어째서 저 많은 노예들이 불과 몇몇의 감독자들에게 굴종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품어왔다. 사회가 형성된 이래 이러한 사태는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그러한 요소들이 사회적 민주화의 장애가 되고 있는 나라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 중에서
㉯ 우리 세 식구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
나의 하늘이다
프레스에 찍힌 손을 부여안고 병원으로 갔을 때
손을 붙일 수도 병신을 만들 수도 있는 의사 선생님은
나의 하늘이다
두달째 임금이 막히고 노조를 결성하다 경찰서에 끌려가
세상에 죄 한번 짓지 않은 우리를
감옥소에 집어넌다는 경찰관님은
항시 두려운 하늘이다
죄인을 만들 수도 살릴 수도 있는 판검사님은 무서운 하늘이다 (중략)
- 박노해, 〈하늘〉 중에서
㉰ 영달이 넉달 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에는 한참 추수기에 이르러 있었고 이미 공사는 막판이었다. 곧 겨울이 오게 되면 공사가 새봄으로 연기될 테고 오래 머물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는 진작부터 예상했던 터였다. 아니나다를까, 현장사무소가 사흘 전에 문을 닫았고, 영달이는 밥집에서 달아날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중략)
걸을수록 백화는 말이 많아졌고 걸음은 자꾸 쳐졌다. 백화는 여러 도시에서 한창 날리던 시절의 얘기를 늘어놓았다. 여자가 결론지은 얘기는 결국 화류계의 사랑이란 돈 놓고 돈 먹기 외에는 모두 사기라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자기 보퉁이를 꾹꾹 찌르면서 말했다.
“아저씨네는 뭘 갖고 다녀요? 망치나 톱이겠지 머. 요 속에는 단속치마 몇벌, 빤쓰, 화장품, 그런 게 들었지요. 속치마 꼴을 보면 내 신세하구 똑같아요. 하두 빨아서 빛이 바래구 재봉실이 나들나들하게 닳아 끊어졌어요.”
- 황석영, <삼포가는 길> 중에서
>>핵심 키워드
메이데이
공산주의
아나키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