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베버와 마르크스
[시민 자본주의에 관하여] 자본주의는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資本?한마디로 말해 돈)이 지배하는 경제체제를 말합니다. 하지만, 훨씬 복잡한 의미를 갖고 있어요. 이윤획득을 위한 상품생산이라는 뜻으로도, 단순히 화폐경제와 동의어로도 쓰이기도 하고, 사유재산제(私有財産制)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 경제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20세기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각축장이었습니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경제적 불평등이 낳은 계급과 부의 불균형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해결하려는 마르크스 사상을 뜻합니다. 사실 20세기를 거치며 지구상에 수많은 공산주의 국가가 나타났다 명멸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를 위협할 만큼 위세가 대단했지요.
마르크스는 “많은 사람들의 노동이 극소수 특권 계급의 자본으로 바뀐다”며 자본주의의 붕괴와 프롤레타리아 혁명, 그리고 공산주의 탄생을 예견했지요. (좀 더 깊이 얘기하자면,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사회변혁이 역사 이론적으로 정당한 것이며, 계급대립의 철폐와 해방이 역사적 필연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필연’이라는 마르크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나라가 아직 존재하고, 그 중에서도 우리와 한 핏줄인 북한이 있지요. 하지만 공산국가 대개가 가난을 면치 못하고 있어요.
사실, 공산주의의 몰락은, 시장 자본주의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가 인간의 번영과 안정을 창출하기 위한 가장 우월한 체제라는 것을 방증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 이론의 기본적 취약성은 자본주의 사회의 끈질긴 존속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심각한 검토가 결여된 데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어요. 한마디로 공상(空想)이란 얘기지요. 20세기에 경험한 놀라운 과학기술의 발전을 전혀 예상치 못한 마르크스는 ‘계급 투쟁’에만 골몰했던 것이지요. 현대사회가 보여주는 계급의 세분화는 ‘자본계급’, ‘노동계급’ 등으로 단순 도식화한 마르크스의 계급이론으로는 설명이 안 될 정도로 다원화됐습니다.
그렇다고 마르크스가 지적한 자본주의의 문제점이 죄다 해결됐을까요? 노동자의 고용은 여전히 불안하고, 실업률은 해마다 치솟고, 가난은 세습되고 있으며, 삶의 질을 확보해주던 공동체의 사회 안전망은 여전히 부실하고 부족합니다.
자본주의는 효율성과 자유, 경제성장 면에서 성과를 냈지만 경제의 불안정성과 빈부격차 면에서의 약점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셈이지요.
숙명여대 여건종 교수는 “자본주의를 제대로 끌어안고 가기 위해 자본주의에 대한 탐색은 계속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자본주의는 그것이 막 등장했던 초기 산업자본주의 단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풍요로운 잠재력을 실현시키는 효과적인 제도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안정을 위협하는 파괴적인 제도이기도 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자본주의의 모순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 모순을 규명하고 수정하는 노력을 중단해선 안 됩니다. 그 노력의 주체는 자본가도, 정책 결정자도, 경제학자도 아닌 일반 시민의 몫입니다. 자본주의를 제대로 이해하려는 자발적 의지와 각성된 인식을 ‘시민적 교양’이라 부른다면, 그런 시민이 변화시킨 자본주의 체제는 분명 ‘시민 자본주의’일 것입니다.
시민 자본주의는 성장과 효율, 경쟁의 물신(物神)체제를 옹호하는 ‘자유시장 주주(株主) 자본주의’를 거부합니다. 대신 함께 나누고 부족한 것을 매우며 사회안전망을 튼튼히 구축하는 시민 자본주의를 지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재 진행형이 틀림없습니다.
시민 자본주의 사상에는 ‘시민 불복종’의 개념이 숨어 있습니다. 시민 불복종을 정당화한 존 롤스는 “정부 정책이나 법률이 정당성을 잃었을 때, 법을 반대하는 것은 양심적인 행위”라고 했습니다. 불복종의 방법으로는 파업과 불매운동, 가두시위 등이 있어요.
이 같은 ‘양심적인 불복종’의 배경에는, 학교 수업시간에 배운, 교육의 힘이 담겨 있습니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 교육에 영향 받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미국의 교육사회학자인 애플(Michael Apple)과 지루(Hernry Giroux)는 “학습자는 교육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경험 속에서 스스로 체득한 세계관을 통해 지배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극복할 수 있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봤습니다. 애플과 지루의 주장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중 한 사람인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와 다릅니다. 그람시는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사회정치 세계의 이데올로기 구조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된다”며 인간을 수동적인 존재로 봤지요.
그러나 애플과 지루는 그람시의 주장을 거부하며 “피지배집단의 사람들은 사회구조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의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어요. 그런 능동성과 주체성이 바로 ‘시민 자본주의’의 배경이기도 합니다.
지루는 ‘비판적 인간’이란 개념을 교육학에 도입했는데, 비판적 인간이란 정의와 해방을 추구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뜻합니다. 세상을 비판적이고 반성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는 눈, 나아가 세상을 실제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비판적 인간입니다.
진화인류학자인 하워드 블룸는 저서 《천재자본주의 vs 야수자본주의》를 통해 “새로운 자본주의의 변화는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는 이타적 정신, 인류복지에 기여하려는 열망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가 잉태될 무렵의 자본가 정신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2010년 국내 소개된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정신》에 이런 구절이 있더군요.
<...자본주의의 기원은 신(神)의 소명에 충실하려 했던 청교도 정신에서 비롯됐다. 근면한 노동과 금욕주의적 생활의 결과인 이윤 획득과 사업번창이 신의 구원을 확증해주는 주관적인 믿음이 자본주의 정신이다....>
베버는 “영리욕, 이윤 추구, 화폐 획득, 그것도 가능한 한 많은 화폐취득을 추구하는 것 자체는 자본주의와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본주의는 이런 비합리적이며 무제한적인 탐욕을 동력으로 삼는 체제가 아니라, 그 탐욕을 합리적으로 억제하고 조절하는 체제라는 것이 베버의 관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새로운 시민 자본주의 지향점은 바로 자본주의가 처음 잉태되던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이 돼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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