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판결을 보면 혼란스럽다. 상식적으로 너무나 악랄한 범죄인데도 형이 가볍다. 알고 보니 그 이유는 반성하고 합의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보니 양형 기준이 그리 복잡하지 않다. 기본적으로 반성하는 지 여부와 합의 여부가 핵심 감형 사유이다. 달리 감경 사유는 거의 없다. 거의 메모 수준의 양형 기준이다. 적어도 일반인에게 알려진 양형 기준은 그러하다.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행위 시의 반사회성을 고려하여 형이 결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행위시는 악랄한 범죄이나 사후적 행위에 의하여 비정상적으로 가벼운 형이 내려진다. 물론 충분히 이해가 된다. 사후적으로 자신을 뉘우치고 피해자와의 합의 등 노력을 하였으니 재범의 우려 등이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살펴보면 상당히 작위적인 측면이 있다. 무엇보다도 법원편의주의 적인 요소가 있다. 사건이 급증하는 데 자백을 하게 되면 간이 절차로 넘어가게 된다. 법원, 검찰, 그리고 피해자 모두가 원하는 바다. 그리고 형의 선고에 대하여 그 어느 누구도 아무런 부담이 없다. 즉 법기술적으로 접근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법원 편의에 의한 양형 기준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악독한 범죄라도 사후적인 행동으로 감경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심하다. 예를 들어 강간을 범한 경우에도 합의하면 집행유예가 된다. 심지어 검찰단계에서는 기소유예 내지 구약식으로 그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물론 이 경우에 판사가 기록을 제대로 검토하여 정식재판으로 넘겨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판사가 사건이 많으면 제대로 보지 못하여 간과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에 비하여 곰탕집 강제추행 사건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형이 지나치게 높다. 심지어 이 사안에서 신체 접촉여부도 불분명하다. 신문지상의 보도에 의하면 보기에 따라서는 법원의 사실인정은 거의 추측에 가까울 정도이다. 이는 형사법원칙에도 반한다. 즉 엄격하게 공소사실이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정도의 입증되어야 하는데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1심은 실형을 선고하였다. 이로써 전국민이 경악하였다. 그런데 법원의 양형 기준에 의하면 달리 놀랄 일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부인하니 괘씸죄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법원은 부인의 경우에 형을 중하게 내린다. 물론 이해가 된다. 부인한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안에 따라서는 부인할 수 밖에 없는 경우도 발생된다.
곰탕집 추행사건의 경우에 실형은 예견되었다고 할 수 있다. 대법원의 양형 기준에 의하면 강제추행사건에서 달리 감경사유가 없으면 징역형이 양형 기준에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행위를 강제추행죄로 적용하였기 때문이라고도 보여진다. 형법상 달리 적정한 법조문이 없기 때문에 그간 법원은 강제추행죄로 의율하였다. 이 경우가 강제추행죄에 해당되는 지 여부에 관하여는 다소 의문이 든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강제추행죄는 강제적인 수단을 사용한 추행을 말한다. 그런데 이 경우에 단순한 신체접촉을 과연 강제적인 수단을 사용한 경우로 보는 것은 다소 논란의 소지가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하여 여성계 입장에서는 강력하게 반발할 것이다. 물론 그 행동은 잘못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를 강간에 준하는 범죄로 보는 것은 지나치다고 아니할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성인지 감수성이다. 그간 여성이 불평등하게 대우받은 것에 대한 보상차원의 정책은 이해가 간다. 그런 맥락에서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용어가 역사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용어가 형사재판에 사용되고 있다. 원래 대법원에서는 처음에 민사사건에서 사용하였다. 그런데 하급심에서는 형사사건에 까지 그 적용 범위를 넓힌 것이다.
개념 자체가 애매한 ‘성인지 감수성’ 때문에 전국 법원은 성추행 사건에서 공판심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심각한 문제이다. 판사 역시 자신의 경력관리 등에 대한 이해관계가 있기 때문에 여론의 눈치를 보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지하철이나 극장 등 다중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우발적인 접촉의 가능성이 있다. 접촉의 느낌은 다양할 수 있다. 실제 연구결과에 의하면 '보는 대로 믿는 것'과 '믿는 대로 보는 것' 중 '믿는 대로 보는 것'이 많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이와 같은 신체 접촉에서 과장 내지 오인의 가능성이 적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작금의 현실은 피해자인 여성이 주장하면 법원은 거의 다 피해자의 주장대로 판결을 하는 양상이다. 실제 남성 법관으로서는 이에 대한 여론의 부담을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아니 이런 사건에 있어서는 그저 피해자 중심으로 판단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일 정도이다. 이는 분명 문제가 있다. 그 구체적인 상황을 분석하여 피해자의 인식이나 주장에서 문제가 없는지를 면밀하게 검토하여 형사법원칙에 부합한 판결을 내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하지 아니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의 진술이 객관적인 샹황과 부합하지 않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는 분위기이다. 이는 심각한 문제이다. 그럼에도 그 어느 누구 이에 대한 문제제기가 없다. 이 역시 문제이다. 국민의 헌법상 보장된 재판청구권이 위협될 정도로 심각해 보인다.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법원의 법원편의주의적인 태도이다. 형사사건에 대하여 자백을 하고 합의를 유도하는 방향성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물론 일면의 타당성이 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나아가 피해자와의 합의를 유도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문제는 사안의 성격상 자백에 친하지 아니하고 나아가 합의 자체가 불가능한 사안에 대한 법원의 태도이다. 이런 사건의 경우에도 법원은 획일적이고 경직된 태도를 보인다. 무엇보다도 이런 피고인에 대하여 적대적이다. 그리고 피고인의 열악한 지위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귀찮고 무시하는 경향을 띠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소위 말하는 무전유죄의 성향이 나타난다는 점이 더 심각한 문제이다. 헌법상으로 피의자나 피고인은 진술거부권이 인정된다. 이는 곧 자백을 하지 아니하는 것이 헌법상 권리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권리의 행사로 인하여 달리 불이익 처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기본 원칙이 무시되는 분위기이다.
실제로 곰탕집의 사안에서 검찰은 벌금형을 구형하였다. 그런데 법원은 1심에서 실형을 선고한 것이다. 이는 형사법원칙을 떠나 일반 상식에도 반하는 선고이다. 그러나 법원은 이와 같은 형의 선고가 양형 기준에 맞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강간을 행하고 집행유예를 선고받는 것에 비하여 보면 과연 정당화될 것인가? 여기에서 분명 양형 기준의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법원은 양형 기준에 의하여 스스로를 정당화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이번 판결에 대하여 정당성을 인정하지 아니할 것이다. 판사 스스로가 그와 같은 판결에 직면한다면 과연 승복할 것인가?
쉽게 말하면 현재의 법원은 마치 처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판사는 피고인의 억울한 처벌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판사의 역할이 검사보다 더 처벌 지향적이라면 이는 문제이다. 곰탕집 강제추행의 경우에 과연 징역형을 선고할 정도인지는 의문이다. 더욱이 구체적인 증거도 없는 상태라면 더욱 더 그렇다. 법원은 분명 자유심증주의에 의한 판결이었다고 강변할 것이다. 그러나 자유심증주의 역시 한계가 있다. 또한 이는 대법원의 양형기준에 부합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 전반에 흐르는 상식이 있는 것이다. 초범인 상태에서 그리고 극히 순간적인 접촉인데 과연 이를 강제추행으로 몰아 실형 내지 징역형으로 그 사람의 인생에 평생의 올가미를 매는 것이 과연 정당화될 것인가? 양형 기준이 합리적으로 그리고 융통 성있게 바뀌어야 할 것이다.
또한 영화촬영에서 연기의 일환으로 공개적인 장소에서의 다소 과한 행위를 강제추행으로 몰아 징역형을 선고하였다. 이와 같이 피고인의 인생을 완전히 파멸로 모는 행위가 과연 정당화될 것인가? 여기에서도 강제추행의 고의 부분에 대하여는 여전히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사법절차에서의 헌법위배검증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법관은 여론재판이 아니라 좀더 엄격한 증거에 의하여 형사법원칙에 따른 재판을 할 의무를 부여받은 것이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의문이 들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사법부는 더욱 더 경직된 관료 사회화 되어 가고 있다. 이와 같은 사법부에 의하여 한국은 점차 위험한 사회로 나아가는 느낌이다.
사회 각 분야에서 각자가 자신의 역할에 대한 자기 정체성의 확립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다. 특히 사법부의 자기 정체성이 중요하다. 법관은 처벌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판사와 검사의 역할은 다른 것이다. 그런데 마치 법정에 검사와 검사보다 더한 검사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사회 분위기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잘못을 행한 자에 대하여도 갱생의 기회가 주어져야 할 것이다. 위에 든 사안의 경우는 행위에 비하여 너무 지나치게 과중한 형벌이 부과된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아예 정상적인 사회생활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하는 것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도대체 이와 같은 형사정책이 어떻게 정당화될 것인가? 사법부의 역할과 책임이 크다. 무엇보다도 사법부가 여론에 휘둘리고 나아가 정치로 고개를 돌리는 사회 분위기는 반드시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사법권한에 대한 적정한 통제장치 및 제도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