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인생에서 두 개의 시문구가 항상 머리에 맴돈다. 초등학교 시절 읽은 영국 시인의 간단한 시 문구가 그 첫 번째이다. “아름다움은 영원한 기쁨이다.” 이 문구는 아직도 필자에게 생생하다. 그리고 나머지 감명 깊은 문구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정호승 시인의 ‘산산조각’이다. 당시 여러모로 실의에 빠진 필자에게 한줄기 햇살과도 같은 시 구절이었다. “ ...... 그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그간 몰랐던 시의 위대함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필자에게 시라는 신비로운 세계의 또 다른 문을 활짝 열어준 것이다.
인생의 여정에서 누구나 ‘산산조각’의 순간이 있다. 이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도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이르면 어쩔 수 없이 이를 경험하게 된다. 죽음 그 자체도 일종의 산산조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산산조각을 달리 피할 수 없다. 다만 중요한 점은 이 순간 각자 대응하는 마음자세와 의지이다. 응전은 각자의 의지와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인간의 삶에서 진정한 의미가 있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정호승 시인은 최악의 상황에서 각자의 대응 자세에 대하여 강한 메시지를 주고 있다.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최악의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게 한다. 오히려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새로이 얻은 것이 있다고 이를 일깨워 준다. 즉 ‘산산조각’ 자체를 얻게 해 주었다는 긍정적 메세지이다. 일반적으로 산산조각의 의미는 모든 것을 잃는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산산조각이라는 새로운 얻음이 있음을 일깨워주고 있다. 물론 산산조각의 의미는 그 본래의 효용이 다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본래의 용도가 아니라 다른 용도에서는 다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산산조각이 다른 시각에서 다른 효용을 가질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인생의 성공을 처음 목표한 지점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때 이룬 경우에만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당초의 목표 지점에서 그 성과를 이루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목표한 지점에 이르지도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심한 풍랑을 맞이하여 목표지점이 아닌 다른 엉뚱한 항구나 섬 등에 이르러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런데 놀라운 기적이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비록 당초 목표지점에 도달하지는 못하여 성공은 아닐지라도 다른 항구에서 의외의 성과나 좋은 결실을 얻게 되는 경우가 많다. 콜롬버스의 신대륙의 발견도 그런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뉴튼의 만유 인력의 법칙의 발견도 당초 목표에 의한 달성과는 거리가 멀다. 당초의 목표를 위하여 노력하던 중 엉뚱하게 다른 곳에서 성공 아니 기적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극단적 해석이 가능하다. 즉 산산조각이 났다고 해서 모든 면에서 산산조각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다른 시각에서 보면 하나의 기적이 될 수 있다. 산산조각이라는 과정을 겪지 않고 기적이라는 축복을 받기는 어렵다. 물론 단지 기적을 추구한다고 기적이 그냥 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부터의 강한 응집이 필요하다. 이에 따라 당초의 목표의 관점에서는 산산조각이 나 실패한 사례가 다른 곳에서 엉뚱하게 기적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다소 역설적이다. 물론 모든 산산조각이 다 기적으로 전환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시 문구처럼 산산조각으로 얻은 산산조각이 가끔은 기적으로 환생될 가능성은 있다. 기적이 달리 특별한 게 있을까? 평소 기대하지 않았으나 의외로 놀라울 만큼의 축복을 가져다 줌을 의미할 뿐이다. 당초 설정한 목표 지점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 우리는 이를 흔히 그 항해는 산산조각이 났다고 한다. 그러나 풍랑으로 우연히 방문한 다른 섬에서 예상치 않은 더 많은 진리와 보물을 발견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이는 기적임에 틀림이 없다. 즉 당초 가기로 한 섬에 이르지 못하였다면 이는 ‘산산조각’일 수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다른 섬에서 큰 기회를 발견하였다면 이는 기적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보면 만사 생각하기 나름이다. 어차피 재앙과 고난은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다가온다. 이 재앙 자체를 조정할 능력은 인간에게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재앙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를 극복할 것인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인간에게는 이 능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를 위하여서는 순발력있는 대응이 관건이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이를 감정적보다는 이성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부정적 보다는 긍정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정호승 시인의 시 구절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산산조각이 모든 것을 다 파괴소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허나 미래로 나아가는 희망이나 긍정에너지 자체마저 말살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먼저 산산조각이라는 현실을 그냥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나아가 산산조각 자체나마 이를 얻은 것에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 그렇다면 이미 기적은 일어난 셈이다. 모두에게 극단적 절망인 산산조각의 상황에서도 긍정적 자세를 취하는 자체가 이미 기적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배우는 자세를 취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가장 행복한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산산조각의 상황에서도 감사할 줄 안다면 그 무엇이 두려울까? 이미 그 자체가 기적이다.
국내외 어려움이 많다. 지금의 상황이 어떤 이에게는 산산조각의 상황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저 감사하고 배우는 자세로 바라본다면 그 느낌은 완전히 다를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기적의 순간으로 승화 발전될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이는 곧 기적을 부르는 신호탄이 될 수 있다. 어쩌면 '산산조각'과 기적은 한 몸일 수 있다. 그저 동전의 양면이다. 따라서 결코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산산조각이 없다면 어찌 기적이 탄생할 수 있을까?
모든 현상에서 긍정적으로 보면 기적이고 부정적으로 보면 산산조각일 뿐이다. 이러한 지혜는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너무나도 소중한 깨달음이다. 현실에서의 큰 가르침이다. 이를 일꺠워 준 정호승시인께 마음 깊이 감사를 드리고 싶다. 그러고 보니 모든 현재의 순간 순간이 다 기적이다. 산산조각도 기적이라면 일상은 더 큰 기적일 것이다. 그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진리의 발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