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상영된 영화의 주인공이 한 말이 기억에 맴돈다. ” 법은 사람을 처벌하지 않기 위해 있다."
이말은 갑자기 골프 규칙을 연상시켰다. 실제로 골프 규칙을 어겨 프로 골프선수도 벌타를 받는 경우를 본다. 그러나 골프를 하면서 절감하는 것은 골프 규칙의 목적이다. 골프 규칙은 기본적으로 선수들을 위함이라는 사실을 절감한다. 예를 들어 페널티(과거 해저드) 지역에서도 쳐야 한다면 몇 타를 더 쳐야 할지 모른다. 아니면 경우에 따라서는 영원히그 페널티 지역에서 빠져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그냥 1벌타만 받고 페널티 경계지역으로 부터 2클럽이내 지역에서 치는 것이 그저 감사한 경우가 많다. 그렇게 보면 법도 그런 측면이 있을까?
갑자기 이 발언이 나오게 된 배경이 궁금했다. 알고 보니 그 영화의 감독은 배심원 제도 등을 이해하기 위하여 한 학기 법학 과목을 청강했다고 한다. 이 말은 해당 강의에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한다. ”법은 왜 있냐?"라는 질문이 던져진 것이다.
아무래도 그 답은 다소 부실하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흥미롭다. 다만 그 답변이 너무 축약적일 뿐이다. 그러다 보니 필자로서는 언뜻 이해되지 아니하는 면도 있다. 물론 전체적 의미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법과 골프 규칙은 다르다.
이 말보다 필자에게 와닿는 말이 있었다. “떨리지 않느냐”는 판사의 질문에 어느 배심원이 한 말이다. ”아니요. 처음이라 잘하고 싶어요......“
이 말은 그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갑자기 법정경험이 생각난다. 법정은 다른 세상이다. 21세기가 아닌 이씨 조선시대로 변호사를 내던지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예를 들어보자. 1983년 법대를 갓 졸업한 사법연수원생 시절에 판사실에서의 경험담이다. 당시 판사의 말이 생각난다. 아주 어린 검사보고 ”영감“이라고 하여 화들짝 놀랐다. 더 놀란 말은 판사실의 여직원에게 한 말이다. ”아가야........“ 아니 내가 지금 이씨 왕조시대로 시간 여행온 느낌 그 자체였다. 그 판사 분은 상당히 존경을 받고 있었다. 나중에 대법원판사까지 오르셨다.
그렇지만 이 경험은 어린 필자에게는 판사에 대한 선망을 완전히 깨버렸다. 당시 20대 초반인 필자에게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런 황당한 시대극(?)은 필자의 진로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 이후 필자는 그 당시 열풍이었던 유학의 길로 떠나게 되었다. 물론 가시밭길이었다. 그렇지만 젊고 당당하게 살아야 할 이유를 일깨워 준 소중한 경험이었다.
배심원의 이 말 들은 필자에게 또 다른 감회를 느끼게 하였다. 현실 법정에서의 느낌과는 다르게 신선했다. 법원의 시각에서 보면 형사 사건은 수많은 사건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저 '죽은 기록'일 뿐이다. 단지 시한 내로 처리해야 할 밀린 '숙제'로만 보인다. 관심사항은 진실 규명은 아니었다. 극단적으로 시간만이 문제가 될 뿐이었다. 누구나 억울함이 깔려있었지만 무감각하게 외면당하는 분위기였다.
어느 칼럼에서 "판사에게 진실 규명이 자신의 업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문구를 접한 적이 있었다. 다만 현재의 갈등을 효과적으로 조정하는 것이 목표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실체적 진실규명이 최우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수많은 기록에서 비교적 원만하게 갈등관계를 해소하는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말로 들린다. 일면으로는 수긍도 간다. 그렇지만 형사재판은 다르지 않을까? 형사재판에서 그렇게 접근하면 곤란하지 않을까?
필자에게 현직 판사였던 강사의 답은 그리 와닿지 않는다. 법정에서의 현실은 좀 다르기 때문이다. “법이 왜 있냐?” 는 질문에 법정 분위기는 그저 다른 답을 주기 때문이다. 오히려“법은 처벌하기 위해 있다”가 법정을 무겁게 누르는 일반적 분위기이다. 기소가 되었으니 죄가 있을 것이다. 즉 유죄의 추정이 현실로 보였다. 그러다 보니 유죄의 판결문은 간단한 메모 수준이다. 반면에 무죄는 거의 논문 수준이다. 그래서 판사는 거의 조건 반사적으로 무죄에 일종의 거부반응(?)이 있는 것 같았다.물론 이는 필자의 편견일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이런 표현에 공감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강사의 표현대로 법정 현실이 이루어진다면 깊이 공감을 할 것이다. 그러나 법정은 수많은 사건을 그저 공장처럼 판결을 찍어 낼 따름일 뿐이었다. 배심원의 발언처럼 초심으로 눈을 반짝이는 모습을 보고싶다. 실제로 그런 모습은 더 없이 신선한 행복을 느끼게 할 것이다..
실제 형사 사안에서 판사의 잣대와 배심원의 잣대가 다르다. 판사는 그 누구보다도 법을 잘 아는 법률전문가이다. 따라서 판사의 잣대는 법의 취지와 그 존재 이유에 충실할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다르다. 그 반대로 판사는 배심원보다 무죄율에서 상상이상의 차이를 보였다. 무죄율이 판사보다 배심원이 3배나 높다고 한다. 이에 따라 경험있는 변호사들은 국민참여 재판을 선호한다고 한다.
국민 참여 재판에서 판사와 배심원의 결론이 다른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대다수는 일치한다. 통계에 의하면 그간 국민참여 재판에서 배심원과 판사의 결론의 일치율은 93%이라고 한다. 다만 차이가 있는 155건이 문제이다. 이들 사건에서 대부분 배심원은 무죄의 평결을 내렸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배심원들의 무죄평결에도 불구하고 재판부가 유죄로 변경한 것이다. 이는 실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국민 참여 재판 법상으로는 재판부가 배심원의 평결에 구속되지는 아니한다. 그렇지만 법 규정을 떠나 이런 재판부의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는 형사법 기본원칙에 반한다. 배심원의 무죄평결에도 불구하고 판사가 유죄판결은 내린 것은 형사기본법원칙에 반하다. 이는 적어도 “공소사실이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정도의 입증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점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판사는 법의 전문가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와 같은 결과를 판사가 내린 것인가? 과연 이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도대체 판사가 형사법 기본원칙에 반하는 결정을 할 수 있을까? 배심원이 너무 무식하게 평결을 내린 결과일까? 아니면 일반인으로 구성된 배심원을 폄훼하고 무시한 것일까?
이 부분은 현재의 형사재판제도의 문제점과도 연결된다. 현행 사법제도의 운영상의 문제점을 어느 정도 노정하는 면도 있을 것이다. 이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의 법원의 판결이 일반 상식에 비추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와 같은 문제의 기본적인 원인을 규명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배심원의 발언에서도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즉 배심원은 법률 전문가는 아니지만 초심으로 사건을 접근한다. 이에 반하여 법률 전문가이나 직업인인 판사에게는 모든 사건이 ‘살아있는 사건’이 아니라 그저 기한 내로 처리해야 할 ‘죽은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간의 고정관념 내지 편견에 의한 프레임으로 접근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초심을 유지하기가 여러 상황상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전문성이 중요하다. 다만 현대 사회에서 지식의 과다는 더 이상 그리 중요하지 않다. 모든 정보와 경험은 온 세상에 깔려 있기 떄문이다. 관건은 사건을 대하는 마음 자세의 문제이다. 그 만큼 초심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의 형사 재판 시스템 하에서는 많은 사건을 제한된 시간 내에 다루어야 할 판사에게 초심을 유지하도록 강요하기는 어렵다. 사건 수도 너무 많고 업무량도 너무 과중하다.
그리고 사실인정과 법리적용을 모두 판사에게만 맡기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복잡한 현대사회의 사실관계를 직접적 사회경험이 거의 없는 판사에게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이다. 영미법 계처럼 사실인정과 법리 적용 부분을 이원화 할 필요가 있다. 무리한 부담을 강요하면서 이의 해결을 방치한 셈이다. 그리곤 그저 불만만을 터뜨릴 수 만은 없다. 근본 문제부터 해결하여야 한다. 먼저 판사를 증원해야 한다. 필요하면 파트 타임 판사직으로 전관 판사를 활용할 필요도 있다.
미국에서 주 대법원판사와 연방 대법원판사 모두 경험한 미국의 데이비드 샤우터 판사가 한 말이 생각난다.
“나와 같은 판사들이 태무심하게 느껴온 형사법 원칙이 있다.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정도의 입증'이 바로 그것이다. 판사시절 배심원들이 초심을 가지고 이에 집착하는 모습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 이는 곧 내가 연방 대법원판사로 활동할 때 큰 영향을 미쳤다. 이같은 장점을 가진 배심원 제도를 결코 폄훼하여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