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판결이 곧 법인 불문법 국가이다. 따라서 미국의 로스쿨에서는 성문법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법원의 판결문을 연구.분석하여 거꾸로 법을 추론해 낸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 로스쿨 학생 들에게 조차 판결문은 해석이 어려운 또 다른 언어라는 점이다. 그래서 실제 로스쿨 3년을 마쳐도 구체적인 법을 모르는 경우가 상당수 있다고 한다. 로스쿨에서 배우는 수많은 판결문을 통하여 법보다는 구체적인 사건에서 자기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주장하는 토론법을 배우는 데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무슨 말도 안되는 말을 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사실이다. 실제로 로스쿨 졸업 이후 변호사 시험을 위한 바브리(Bar Bri)등 단기 법률 요약 전문학원강좌를 듣고서야 법을 알게 되었다는 로스쿨 졸업생의 다소 충격적인 고백을 접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다소의 과장은 있겠지만 그만큼 미국에서의 법은 판례법이어서 개별적인 경우에 따라 다르고 개별 소송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개별사건에서의 주장의 논리적 근거와 설득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방증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거의 모든 나라에서 판관의 지위는 귀족들이 보유하였다. 분쟁 당사자는 주로 무식한 일반 서민이어서 유식할 뿐만 아니라 군림하는 권력자인 귀족이 내린 결정에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였다. 영국의 경우는 백마를 탄 귀족이 영국 전 지역을 돌면서 재판을 하였는데 해당 지역의 실정과 그 관습 등을 모르기 때문에 해당 행위가 죄가 되는지 여부 등에 대한 판단을 지역주민의 도움을 받아 하였다. 이것이 배심원제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배심원의 평결에 기초하여 군림하는 귀족이 판결을 내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이유에서 판결문은 여전히 귀족 편의적 즉 법원행정 편의적인 특성을 여전히 가지게 된 것이다.
민사판결문의 경우는 과거 권위적인 경향에서 많은 발전이 이루어 진 것이 사실이다. 특히 원.피고 양당사자가 각자 주장 및 입증을 개진하고 있어서 이에 대한 판단이 비교적 상세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일부 주장에 대한 판단이 누락되고 있는 점이다. 물론 당사자 중에는 중복되거나 명확하지 아니한 주장을 개진하여 달리 이에 대한 판단이 다소 불필요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간혹 중요한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재판부가 이를 간과하는 듯한 부분이 보여 이점은 아쉬운 점이 있고 따라서 이의 실질적 개선이 필요하다.
형사판결문의 경우는 좀 더 심각하다. 피고인의 잘못에 대한 사회적인 처벌은 당연하다. 그러나 사실인정이나 법리적용 등에 있어서 오류가 있다면 이에 대한 피고인의 방어권은 충분히 보장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 법원의 유죄판결문에서 판결 이유의 기재가 너무 간단하다는 사실이다. 이에 반하여 오히려 민사판결은 원.피고의 각 주장에 대하여 상세하게 분석하여 판단하고 그 이유를 상세하게 기재하고 있다. 이런 현실은 법 원칙을 떠나 상식적 차원에서 바라보아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없었다. 어쩌면 이 영역이 법의 취약지대라고 해도 달리 할 말이 없을 정도이다. 유죄판결에 내리게 된 구체적인 증거와 그 입증 기타 피고인의 주장에 대한 판단이 너무나도 미흡하게 느끼게 하는 판결이 없지 않다. 심지어 유죄인정의 증거도 단지 “증인000의 이에 부합하는 진술” 이라는 말로 그친 판결문을 보면 솔직하게 당혹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나아가 증인의 진술이 엇갈리는 경우에도 “증인000의 이에 부합하는 일부 진술”만으로 기재된 것을 보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피고인의 인생이 달릴 정도로 중대한 사안인데 막연한 추상적인 이유 기재만으로 충분할까?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차원에서는 안타깝다.
물론 판결의 권위는 당연히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편견이나 기타 시간적인 제약 등으로 일부 판결의 오류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하기는 어렵다. 최근의 사건의 경우는 하급심과 상급심의 각 판결의 편차가 너무 심하다. 무죄에서 갑자기 실형이 이루어지고 실형이나 집행유예에서 무죄가 선고되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 인기리에 종영된 주말드라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억울하게 모함을 당하여 살인죄로 힘든 인생을 살아온 주인공의 경우 등을 보면 피고인의 방어권문제는 이에 관하여 좀 더 신중하게 고민하게 만든다. 형사법의 기본원칙과 사법소비자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현행 판결문 시스템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유죄인정의 일련의 과정이 좀 더 자세하게 객관적으로 표출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 대법원의 사건 수가 대법원판사나 재판연구관이 하루 24시간 근무를 해도 제대로 기록을 볼 수 없을 정도로까지 심각하고 끔직한 사법현실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 이런 실정은 하급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다 보니 1심 판사는 시간에 쫓겨 기록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될 정도라고 한다. 이에 따라 의심스러운 눈길은 여러 가지로 사실을 곡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재판제도가 3심제도이니 1심 판사로서는 다소 미흡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억울한 부분은 상급심에서 주장하여 판단을 받으라고 이를 미룰 가능성에 대한 오해도 있을 수 있다. 또한 상급심 역시 과중한 사건 수의 부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상급심역시 사건에서 가장 먼저 생생한 증인 등을 접한 1심의 판단을 존중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법원에서는 1심 집중주의를 채택하여 달리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2심의 원심 변경을 자제하도록 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이는 판사들의 과중한 업무부담을 피하고 나아가 신속한 재판을 위하여 불필요한 항소 사건을 억제하고자 하는 고육지책으로 보인다. 물론 필자의 이와 같은 개연성 내지 가능성에 기초한 주장에 대하여는 다른 시각에서 이에 대한 비판 및 반론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소지는 없었는지에 대하여는 한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잘못된 오해는 사법불신을 초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형사 법원칙의 기본은 “의심스러우면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그리고 “사건 확정 되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한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법 원칙은 형사 판결문 시스템에도 그대로 나타나야 한다. 즉 형사법 원칙에 따른다면 무죄 판결문은 아주 간단해도 될지 모르나 유죄판결문은 유죄의 인정 근거가 되는 증거에 대한 판단근거 그리고 추론과정 등이 상세하게 기재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피고인의 헌법상 기본권인 방어권이 실효성 있게 보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현행 유죄판결문은 증거 등의 기재가 너무 간단한 반면에 무죄 판결문은 심한 경우는 거의 논문을 느끼게 할 정도로 상세하다. 도대체 이와 같은 판결문 작성 관행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형사법기본원칙과 사법소비자의 시각으로는 솔직히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무죄 판결문을 쓰기가 어렵고 힘들어서 무죄판결이 적다는 말까지 들릴 정도이다. 물론 이런 말을 그대로 믿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형사판결문을 접하면 이와 같은 다소 황당한 비판이 너무 터무니없지 만은 않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제 모든 영역은 이용자 내지 소비자가 주인이고 해당 시장을 주도하는 공개 투명한 디지털시대이다. 사법 분야에서도 사법 소비자의 시각에서 사법 현실이 재정비되어야 한다. 판결문 역시 사법 소비자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그리고 일반 법 원칙에 충실하게 사법제도가 운용되어야 한다. 무죄 추정의 원칙에 충실하기 위하여서는 무죄판결은 간단해도 가능하겠지만 유죄 판결문은 증거법 원칙에 충실하여 그 증거가 왜 유죄의 인정 근거가 되는지에 대하여 좀 더 명확하고 상세한 이유기재가 요구된다.
당사자에게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하면 형사 유죄판결문은 적어도 민사판결문보다는 좀 더 상세한 기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는 헌법상의 재판 청구권이라는 헌법상의 기본권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과거 귀족들 중심의 비민주적인 사법절차나 원님 재판 식의 시각에서 벗어나 사법 소비자 친화적인 사법개혁이 판결문에서부터 하루 빨리 시작될 필요가 있다.
또한 구속 영장도 마찬가지이다. 불구속이 원칙이라면 구속 영장의 발부는 좀 더 상세한 증거 등 이유기재가 필요한 반면에 반대로 이의 기각의 경우는 간단하게 처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물론 아주 급박한 상황하에서는 그와 같은 특수한 사정이 고려되고 나아가 제도적 운용의 묘를 살려야 할 것이다. 혹시 이와 같은 제도 개선에 판사의 업무 과중 등의 문제가 있다면 판사의 수를 현재의 2-3 배 수준으로 과감하게 늘려 이에 대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판사 수를 좀 더 많이 증원함으로써 판사들의 업무부담을 줄이고 나아가 사건 하나하나에 좀 더 충실할 수 있는 제도적 여건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복잡한 사건에서 판사가 사실인정과 법리판단 모두를 부담하는 과정에서 이에 따른 과중한 업무부담과 스트레스가 문제가 된 것이라면 국만 참여재판을 더욱 확대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사실인정은 배심원에게 그리고 법리적용은 판사에게로 이원화하여 상호 균형과 견제를 도모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미국 연방대법관이었던 데이비드 사우터의 값진 고백을 빌리지 않더라도 판사의 초심을 잃지 않게 하는 좋은 제도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판사인 내가 그간 크게 신경을 쓰지 아니하였던 형사법 대원칙 즉 형사재판에서 유죄의 인정은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정도의 입증이 필요하다는 법리에 너무나도 충실하려고 한 배심원의 진지한 자세에 너무 감명을 받았고 이는 곧 나의 연방대법관으로서의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이런 측면에서 보더라도 배심원제도는 결코 폄하되어서는 아니된다...”
이와 같이 법원칙에 충실한 사법제도 개선은 사법 친화적인 사법제도로 다시 재탄생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사법 분야에서 이제는 시대적인 흐름을 받아 들여 과거의 구태연한 사법 행정 편의주의에서 사법소비자 친화적으로 과감하게 개선될 필요가 있다. 이제 시대적인 흐름에 맞추어 좀더 일반 법원칙에 충실하고 나아가 사법 소비자 친화적인 제도로의 근본적인 개선을 감히 기대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