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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대 신문에 실린 법대 200주년 기념 세미나 모습이다. 왼쪽 끝이 데이비드 사우터 전 미국연방 대법원 판사다. |
2017년 11월 1일은 하버드 법대(Harvard Law School)가 200 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를 기념하는 세미나가 법대 강당에서 열렸다. 특별히 이 대학 출신 전현직 미국 연방 대법원 판사 6인이 참석했는데 유일하게 주(州) 대법원 판사라는 다소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인 데이비드 사우터(David Souter) 전 연방 대법원 판사의 발언이 필자를 놀라게 했다.
세미나 사회자가 “그간 연방 대법원 판사로 재직하면서 어떠한 경험이 가장 미국연방 대법원 판사경력에 도움이 되었느냐”는 다소 엉뚱한 질문에 사우터가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사회자가 의도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아닐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주(州) 법원에서 판사로 재직하던 시절, 배심원들이 법 원칙에 충실했던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마약소지 사건으로 기억하는데 일견 보기에는 피고인이 그 범죄행위를 한 것으로 보여지는 사안이었는데 의외로 당시 배심원들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미안하지만 판사님께서 이야기하신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정도의 입증>이 있는지 여부에 대하여 검토해보건대, 피고인에게 무죄의 평결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법관으로서 형사사건에서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정도의 입증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는데, 법률전문가가 아닌 배심원들이 판사 지침(즉, 사실인정에 있어 적용할 법 이론과 어느 요소를 판단하여 사실인정을 할 지 여부)을 충실하게 따랐기에 놀라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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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사우터 전 미국연방 대법원 판사 |
사우터 전 대법관은 “배심원들의 이 같은 마음자세와 태도에 깊이 감명 받았고, 한편으로는 반성하게 되었다”면서 이렇게 말을 마쳤다.
“그런 경험이 제 판결에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배심원 제도의 독립성, 역할에 대한 충실성이 폄하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계 10대 경제대국에 걸맞게 ‘사법 시스템’ 손질해야
필자는 배심원제에 대한 사우터 전 연방대법원 판사의 발언을 곱씹어 보았다. 배심원들은 법률전문가가 아니다. 법의 해석과 관련한 판사의 지침(Instruction)을 충실히 따라야 한다. 피고인의 인생을 파멸시킬 수도, 갱생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배심원과 판사는 그만큼 엄중한 자리다.
판사들은 일상적으로 형사사건을 접한다. 사우터 전 판사의 고백처럼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정도의 입증> 주장에 둔감하거나 무뎌질 가능성이 있다. 형사 피고인의 결백주장을 통상적인 변명으로 치부할지 모른다. 사우터는 자신의 무뎌진 마음을 오히려 법률전문가가 아닌 배심원들을 통해 반성하게 됐다고 고백했다. 이후 법률가로서 정체성 인식과 역할 수행에 큰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이에 반해 국내 법원은 어떤 상황일까. 연간 대법원의 선고건수가 3000건이 넘는다고 한다. 사건 하나하나가 형사법의 기본원칙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법관들의 업무과다가 무엇보다 큰 장애겠지만 법관 역시 배심원제의 취지처럼 소송기록을 검토함에 있어서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사실상 배심원 제도가 없다. 형사법 기본원칙에 따른 사실인정의 의무와 책무를 법관 혼자 떠안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에 발 맞추어 사법제도 역시 국가위상에 맞게 손질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정도의 입증의 필요>라는 형사법 원칙에 충실한 판결이 이뤄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