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프랑크 일기(60)
불리한 상황을 역정시키는 긍정의 힘… 삶에서 느낀 머피의 법칙과 샐리의 법칙
![]() |
필자의 로펌 사무실에 있는 노트북. |
누구나 각자 인생에서 길다면 긴 여정을 살아가면서 어느 날 갑자기 너무 황당할 뿐만이 아니라 상식적으로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역경을 경험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자가 어떻게 반응하며 대처하는가에 따라 각자 자신만의 생존과 생활에서의 경쟁력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소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이를 통하여 인생의 또 다른 묘미를 맛보기도 하고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느낄 수도 있다고 본다.
인생의 업다운 이라는 과정은 누구라도 이를 완전히 외면하거나 피할 수만은 없는 하나의 운명과도 같은 필수 과정이고 절차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런 시기가 오면 이에 대하여 만연히 감정적으로만 반응하기보다는 좀 더 차분히 이성적ㆍ전략적으로 또한 선제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아니하고 단지 감정적으로만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면 자신 스스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나친 노여움 등으로 사로잡혀 스스로 몸과 마음을 다치게 하고 나아가 심한 경우에 끝없는 무기력감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스스로 도저히 이해하거나 수용하기 어려운 자신만의 불행과 불운에 대하여 무리한 핑곗거리를 찾거나 아니면 이의 원인을 자신이 아닌 제삼자의 탓으로 돌리는 등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고 소모하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자신의 불운에 대하여 마냥 끝도 없는 자책감으로 자신을 파탄에 빠지게 하는 극단적인 경우까지 발생할 수 있다. 일상의 모든 과정에 대하여 이를 모두 부정적으로만 보는 사람은 스스로 주변의 상황을 항상 머피의 법칙으로만 연관을 시킬 것이다. 이에 반하여 모든 일을 좀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역경을 하나의 도전으로 보고 이를 헤쳐나가려는 사람에게는 신기하게도 그 주변에서는 샐리의 법칙만이 작동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주변에서 가끔 일어나서 깜짝 놀라게 하는 신비스러운 기적들은 샐리의 법칙이 작동하고 꽃피는 환경에서만 싹틀 수에 없다고 본다. 비근한 예로서 만나는 사람마다 웃으며 먼저 인사를 하는 경우와 그렇지 아니하는 경우를 상정해보자. 먼저 인사를 상대방에게 하게 되면 이를 받은 사람은 그런 인사를 받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게 된다. 이와 같이 기분 좋은 감정은 얼굴에 나타나게 되어 자연스럽게 얼굴의 긴장도 풀리게 하고 나아가 얼굴이나 모든 표정 등이 자연스럽게 밝게 변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사를 한 사람도 인사를 받은 사람의 밝은 모습을 그대로 접하게 되어 상대방이 자기에게 자신처럼 밝게 응대하는 것으로 느껴져서 더 기분이 좋아지게 될 것이다. 나아가 상대방의 반응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감정이 얼굴과 행동에 나타나게 되고 자신의 신체에도 긍정적인 자극으로 와 닿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처럼 밝고 긍정적인 기운과 모습은 상대방에게 전달됨으로써 상호 선순환의 과정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상대방의 호감 표시 등에 힘입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하여도 좀 더 긍정적으로 바라볼 뿐만 아니라 집중도 더 쉽게 하고 또한 이런 긍정적인 자극과 에너지가 스스로 강한 자신감을 가지게 하여 자신의 업무와 생활 자체를 더한층 즐기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는 곧 자신의 업무에 최선을 다하게 하고 또한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만들어 줄 수밖에 없다. 이는 자연스럽게 업무 등에 있어서도 긍정적으로 작동하여 가끔은 주위를 놀라게 할 정도의 업무성과도 이룰 수 있게 되기도 할 것이다.
이에 반하여 상대방을 보고도 인사도 아니 하고 모른 척 지나치게 되면 이런 반응 역시 신기하게도 상대방에게 동일하게 그대로 전달되어 상대방으로 하여금 무의식적으로 기분 좋지 아니한 자극을 가져다주게 된다. 즉 다가온 사람이 인사도 아니 할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긴장한 상태에서 무심한 인상을 지은 것으로 느껴져 이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상대방은 인사를 아니 하고 지나치는 사람이 자신에게 이유없이 그저 좋지 아니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잘못 생각을 하게 만들게 될 것이다.
상대방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 그런 감정이 얼굴과 행동 등에 나타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이런 모습을 보게 되는 그의 상대방 즉 인사 없이 그냥 지나치려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자극은 왠지 부자연스런 모습과 행동으로 발전하게 만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시 상대방에게도 이와 같이 다소 불쾌한 얼굴 모습과 행동 등이 전달되고 이에 따른 자극과 반응을 일으키게 되어 결국 상호 악순환이 진행하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긍정적인 대응을 하는 경우에 나타날 수 있는 의외의 가시적인 성과에 대하여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필자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면 과거에 박사과정에서 박사논문을 준비하던 중에 일어났던 시기가 생각이 난다. 즉 그 당시 사무실에서의 업무가 너무 바빠서 박사과정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고 코스워크를 마치고 나서 작성하여야 할 박사논문 준비과정에서 논문의 주제조차 제대로 정하기 어려워서 실망과 함께 깊은 실의에 빠진 적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 조금 여유를 가지고자 노력하며 나름대로 자신을 잘 다스려 박사논문을 다시 준비하기 위하여 관련한 소 논문주제를 알아보기로 다시 한번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에 따라 여러 사회현상과 현안을 파악하고 분석하면서 간단하게 나름대로 메모를 꾸준하게 진행하곤 하였다. 그러자 다행스럽게도 이 과정에서 새롭고 다양하며 흥미로운 소 논문 주제들을 많이 발견하게 되었고, 이를 메모하는 과정에서 법률가로서의 이러한 생각과 정보를 나 혼자만이 아니라 주위의 여러 사람과도 이를 공유하여 좀 더 건설적인 피드백을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에서 간단한 메모수준의 칼럼을 우연한 기회에 일간지 등에 발표한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많은 사람으로부터 칼럼을 잘 읽었다는 등의 예상외로 상당히 좋은 반응과 의미 있는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이 그 당시에 실의와 무미건조한 일상에 지쳐 있던 필자를 마냥 즐겁게 만들어주어 일상의 대반전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런 묘미 때문에 그 이후에도 많은 칼럼을 쓰게 되었다. 지금도 부족하지만 나름 정성을 다하여 전문분야에서의 틈새 영역의 칼럼을 쓰는 묘미와 보람에 흠뻑 빠져 마냥 모든 것에 감사함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즉 사무실업무 등으로 박사논문을 준비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던 현실적 장애를 겪게 되자 이런 환경을 원망하고 나아가 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자신의 능력부족 등에 대하여 심한 자책감에 빠져들었던 것이었다. 그 당시는 박사학위논문 자체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까지 느껴질 정도로 상당히 힘들었던 시간들로 기억된다. 그러나 논문 대신에 칼럼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필자 나름의 긍정적인 생각이 큰 도움이 되었고 이후 전개된 신비로운 칼럼의 세계는 필자에게 무한한 행복감을 가져다주게 되었다. 이는 실로 엄청나고 크나큰 행운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그때 마냥 자신의 처지만을 비관하고 한탄만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칼럼이라는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나아가 칼럼의 세상에서의 나름의 묘미를 느끼는 즐거움을 맛보기는커녕 오히려 끝없는 무력감 내지 아니 심한 경우에 심한 우울증 혹은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 |
조선DB |
그리고 과거에 전문가단체 모임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모임의 수장격인 특정인이 필자에게 그간 필자가 3~4년 써오고 있었던 칼럼의 중단을 강요하는 심각한 상황이 발생하였다. 필자가 쓰는 칼럼은 해당 단체의 활동과도 전혀 관련이 없었고 또한 그 단체의 이름도 사용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전혀 직ㆍ간접적인 관련이 없었는데도 필자의 자유영역인 칼럼을 쓰지 못하게 하게 하자 너무나도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고정출연진으로서의 방송출연이 막 시작되어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 부분도 중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런 방송중단으로 인하여 나를 추천해 준 방송계의 분들은 나를 배은망덕하고 몰상식한 사람으로 취급하게 하였고 그 이후 더 이상 방송계와는 인연이 닿지 않는 결과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필자를 당혹스럽게 한 일은 칼럼 등을 쓰지 못하게 하는 그 어떤 합리적인 이유를 전혀 발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그러한 현실상황과 특정인의 소위 말하는 갑질(?)에 가까운 독단과 강요가 엄청나게 분통이 터지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테레사 수녀님의 교훈이 불현듯 생각이 나서 불행 중 다행으로 슬기롭게 잘 대처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테레사 수녀님은 사회구호시설에서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항상 “오늘은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을 주셨나요?” 라고 말씀하시면서 “역경”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승화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필자는 이를 본받아 이런 상황을 좀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즉 노여움 대신에 하나님의 또 다른 계시 내지 또 다른 축복으로의 인도로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 분노의 반응으로 만연히 멍하니 손을 놓는 대신에 차선의 대안을 찾기로 한 것이다.
즉 단체 내부의 상호 논란의 소지를 근본적으로 없애기 위하여 억울하지만, 칼럼을 쓰는 것은 이를 잠시 중단하기로 하고 그 대신에 자료를 정리하여 칼럼보다도 더 의미가 있을 수 있는 책자를 직접 발간하기로 마음을 바꾸어 먹었다. 그간 칼럼에 기울였던 정성을 이번에는 책자 발간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기로 한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그 해에만 10권 이상의 법률 전문서적을 발간할 수 있었다.
이처럼 놀라운 책자 발간작업을 마치니 오히려 소위 말하는 갑질(?)을 한 특정인의 독단과 편견에 가득 찬 행위가 필자에게는 엄청난 역경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필자에게는 이를 넘어 하나의 축복으로 업그레이드되고 승화되어 의미 있는 성과를 만들어 준 것이었다. 필자로서는 그 당시 너무나도 불합리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역경이었지만 이에 대하여 만연한 분노만을 느껴서 망연자실하여 시간낭비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대안을 찾아서 나름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게 됨으로써 필자에게는 더없이 새롭고 무한한 축복의 신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역경을 축복으로 전환시켜 온 테레사 수녀님의 놀라운 기적을 몸소 실천한 셈이기도 하였다. 역경을 바라보는 의식을 전환해 도리어 기적(?)을 만든 셈이었다. 테레사 수녀님의 깊고도 의미 있는 큰 가르침을 본받아 이를 그대로 실천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그간 피상적으로만 이해해 온 “긍정의 힘”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현실세계에서 몸소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요즈음도 현실생활에서는 여전히 많은 어려움이 남아 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바로 필자가 이 세상에 살아있다는 것을 달리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고 본다. 필자에게는 이제 모든 역경과 어려운 시간들이 원망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도전의 성취동기를 제공하고 나아가 오히려 역경을 진정으로 감사하게 느끼게 될 정도로 성숙(?)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뿌듯하다. 즉 모든 현실의 과제와 어려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아가 이를 하나님의 계시가 있는 또 다른 도전의 장이며 나아가 축복으로의 과정이고 절차로 느낄 정도의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된 것이다.
어차피 인생은 유한한 것이어서 인생을 이성적으로만 생각한다면 비극이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은 누구나 궁극적으로 다 죽기 때문에 더없이 슬프고 속상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성적 진실인 것이다. 즉 인생이란 이성적으로만 분석한다면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순간으로 서서히 한 걸음씩 다가가는 어둡고도 끔찍한 여정이라는 점에서 비극 그 자체이고 달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다가오는 죽음이라는 어두운 미래보다는 현재라는 순간순간만을 그대로 느끼며 감사할 수만 있다면 인생은 그 죽음이라는 종착역과는 별개로 그 과정 하나하나가 마냥 즐겁고 또한 흥미로운 희곡무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이나 미래의 행복한 순간은 그 자체로서 소중하다. 왜냐하면 행복한 현재의 순간이 즐거운 자체로서 그냥 감사하고, 나아가 먼 날 어려운 시기가 다가와도 그 당시 행복한 시간을 추억할 수 있게 해주니 더욱더 감사할 뿐이다. 그리고 현재나 미래의 불행하고 어려운 시간 역시 또한 의미가 있다. 불행한 현재의 경험은 미래가 비록 권태롭고 밋밋할지라도 과거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하여 미래의 일상의 소중함을 새삼 새롭게 느끼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힘든 고통의 순간을 겪고 난 다음에는 그 이후의 시간이 마냥 감사할 뿐이고 나아가 그 이후에도 이어질 수 있는 또 다른 고통의 순간마저도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게 만들어 주는 신비스러운 묘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힘들 것으로 예상되어지는 미래의 상황 역시 또 다른 축복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앞으로 힘들 미래를 좀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지금 경험하고 있는 현재의 일상적인 시간이 더는 마냥 권태롭거나 단지 밋밋하게만 느껴지게 만들지는 아니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재의 일상이 상대적으로 더욱더 소중하게 와 닿아서 현재의 시간에 대한 감사함을 더욱더 느끼게 해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긍정의 힘이며 축복이라고 본다.
이러한 긍정의 힘은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예상하지도 않았던 놀라운 기적의 순간까지도 체험하게 해줄지 모른다.
이런 기대가 가져다주는 신비로운 묘미로 어려운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를 향하여서도 나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큰 힘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현재의 삶에 좀 더 충실하고자 하는 다짐을 스스로 다시 해본다.
필자에게도 의외의 행운과 기적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간 이후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기적을 만연히 소망하거나 의식적으로 기대하지는 아니하지만, 행여 일어난다면 마치 너무나도 반가운 친구처럼 기쁜 마음으로 그저 반갑게 맞이하고자 하는 담담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 그리고 가능한 한 단순히 현재에만 충실하며 또한 나름 즐기고 있는 지금 바로 이 순간의 삶 그 자체가 의미 있는 하나의 큰 축복임을 깊이 느끼고자 노력하고 싶다. 또한 동시에 이에 그저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