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프랑크 일기(43)
폴와이즈(Paul, Weiss) Alumni Dinner Meeting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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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umni 저녁 식사 모임 자리 |
서울 조선호텔에서 미국 10대 로펌 중의 하나였던 폴와이즈(Paul, Weiss)의 Alumni 저녁모임이 있는 날이다. 한때 미국 콜롬비아 로스쿨에서 가장 가고 싶은 로펌 중의 하나로 뽑혔던 미국 유수의 로펌이었다. 이 초대장은 필자에게 묘한 감동을 가져다주었다.
당시 pricewater 회계법인, 산동회계법인, Paul, Weiss 그리고 한국의 김신유 법률사무소에서 뉴욕증권시장 상장업무를 공동으로 진행하기 위하여 한국로펌의 대표로 필자가 Paul, Weiss에 가게 된 것이었다. 1994년 겨울에 가서 1995년까지 뉴욕사무소에서 정식 급여를 받고 변호사방과 비서까지 지원을 받으면서 소위 말하는 월스트리트 로펌에서 변호사로서 일을 한 셈이었다.
당시 아파트는 Paul, Weiss 바로 건너편에 있었고 1 bedroom에 월 임대료가 2,000불이었는데 당시로는 상당히 비싼 고급아파트였다. 그리고 그해에 필자가 결혼하여 집사람과 함께 생활하였다. Paul, Weiss는 변호사들에 대한 복리후생도 잘 되어 있어서 회사건물 지하에 헬스클럽이 있었고, 연회비의 50%를 회사에서 부담하여 주어 필자와 집사람 두 사람 모두가 퇴근 시간대에 같이 헬스도 하고 목욕도 하고 수영도 즐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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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Weiss Home Page |
또한 바로 옆에 브로드웨이가 위치하여 주중이나 주말에 연극, 오페라, 연주회 등을 수없이 관람하였다. 그리고 주말에는 차를 렌트하여 캐나다부터 미국 전역을 여행하기도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워싱턴D. C.에 사무실이 있어서 그곳에 일하시는 한국 변호사들에게 부탁하여 뉴욕사무실의 생활을 마치고 그곳에서 로펌생활을 간절하게 원하였다.
이런 심정을 아셨는지 흔쾌하게 허락을 하셔서 뉴욕생활을 마치고 그곳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의외의 복병이 생겼다. 소아과 의사인 집사람이 결사반대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신도 한국에서 개업을 해야 하는 데 미국에서 허송세월을 할 수 없다고 즉시 귀국을 강요하였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소중한 기회였는데 아쉬웠다. 그 당시에 Paul, Weiss는 한국통신을 대리하고 나아가 한국대사관을 자문하는 업무를 시작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여러모로 설득을 하여도 안 되고 나중에는 필자가 즉시 귀국을 하지 아니하면 이혼을 하겠다는 이야기까지 나와서 뉴욕 근무를 마치고 눈물을 머금고 한국에 올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여도 너무 아쉬울 뿐이다. 어쨌든 그 당시에 나에게 소중한 기회를 주신 워싱턴 사무실의 권순엽 선배님에게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고자 한다. 그리고 또한 너무 죄송스러울 뿐이다. 지금에 그런 기회가 주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시간은 벌써 25년 가까이 지나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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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Weiss 기념품 |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모임장소를 가니 만감이 교차하였다. Paul, Weiss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Alumni가 한국에 대략 30여 명 된다고 하였다. 거의 다 major 로펌에서 일하고 있었다. 김앤장의 양 변호사님과 광장의 권 변호사님을 뵈니 감회가 새로웠다. 특히 그 당시에 Paul, Weiss의 명성이 대단하여 내가 그곳에 근무한다고 하니 많은 뉴욕시의 현지 변호사가 부러운 눈길을 보내었던 것이 지금도 생생하다.
특히 필자의 비서가 전화가 오면 “Mr. Kim's Office”라면서 전화를 받는 것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 당시에는 미국인을 비서로 두고 있다는 사실이 상당히 뿌듯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자의 비서가 나이가 많은 아줌마였지만 책상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특히 서류를 칼같이 각을 맞추어 잘 정리해주었던 것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지금까지도 기억이 뚜렷하다.
그리고 기억컨대 일부 아르바이트생들이 Paul, Weiss가운을 입고, 메신저로서 각 층을 돌면서 사무실마다 모든 서류를 전달하는 광경은 외국생활이 익숙하지 아니한 이방인인 필자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시각에 따라서는 인간 메신저로 사용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런 광경이 많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당시 필자에게는 이런 모습들이 조금은 불편하고 약간의 거부감마저 든 것도 사실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모두가 전자식으로 전달되어 이런 광경을 더는 찾아보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미국식 저녁 모임이다가 보니 별로 격식이 없어서 진행되어 필자가 답답하여 미리 양해를 구하면서 건배를 제의하였고 각자 3~5분 동안 자기소개를 하도록 제안을 하였다. 의외로 반응이 좋아 각자의 Paul, Weiss 추억, 그리고 현재의 생활 등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호스트를 한 워싱턴DC의 Alex Oh변호사가 필자가 좋은 제안을 하여 유익하였다는 칭찬조의 이야기를 들으니 더한층 기분이 업되었다. 다시 한번 Paul, Weiss에 깊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잠시나마 25년 전으로 돌아가서 그 당시의 즐거웠던 시간으로 여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도쿄의 책임자였던 변호사가 지금은 런던사무실의 책임자가 되었다고 하니 반가울 따름이었다. 만일 내가 영국사무실에 인사차 들리면 과연 나를 알아볼까? 궁금하기도 하고 호기심도 생겨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번 찾아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Alumni 중에는 홍콩사무소의 책임자로 근무하는 미국변호사도 있어서 한번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홍콩비즈니스도 나름대로 잘 된다고 하니, 기회가 되면 한번 찾아보고 싶기도 하였다. 희망컨대 한국에 Paul, Weiss의 사무실을 차리게 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권 변호사님께 이야기하면서 한번 한국대표로 생활하는 것이 어떠하겠느냐고 하자 사양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그리 싫지는 아니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글로벌 온라인 로펌을 꿈꾸는 필자에게는 재미있는 프로젝트로 보였다. 한 국가의 Country Manager를 한다는 것은 짜릿한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모처럼 Paul, Weiss에게서의 좋은 시간, 경험을 공유하는 자리에서 일상의 무료함에서 벗어나고 번잡한 업무의 부담에서 벗어나는 모처럼 가지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모든 Paul, Weiss Alumni 분들의 건승과 행운을 빌고 싶다.
필자 역시 다소 자극이 되는 면이 있어서 좀 더 도전적인 삶을 살아보고자 다짐을 해본다. 그리고 글로벌 프로젝트에서 우연히 그리고 조만간 즐거운 마음으로 서로 만나는 기회를 기대해보고자 한다.